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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딱 2가지만 추구합니다. "영어를 자유롭게 하는 삶" 그리고 "꿈/목표를 마침내 이루는 삶" 저와 함께하시면 다음과 같은 <3가지 가치>를 얻어 가실 수 있습니다. 1. 영어로 일하고 돈 버는 직장인의 '회화 실력 쌓기 15년 시행착오와 노하우' 2. 9년간 '오프라인, 이벤트, 경험' 3가지 키워드로 달려온 일관성 있는 커리어 case study로 알아보는 '내 인생의 꿈/목표를 찾는 구체적인 방법과 전략' 3. 지금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당장 영어라도 하세요.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국에서 영어는 cheat ke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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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
2026년 10월 16일 -멈춤이 길이 되려면 조용히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혼자 뒤처진다는 느낌. 다들 무언가를 만들고, 올리고, 팔고 있는데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지금 돈을 벌지 않고,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 그런데 이 느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뒤처진다'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속도를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생기는 감각이다. 그 기준은 대개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화면 너머로 흘러드는 남들의 성과, 남들의 매출, 남들의 하루다. 남의 속도를 내 눈금으로 사용하는 순간, 멈춤은 곧 손실이 된다. 이 느낌 앞에서, 나는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번 돈으로 당신의 자유시간을 구매한 것이다. 이 시간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일하고, 견디고, 벌어서 구매 시간이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은 시간을 빌려 쓰는 사람의 언어다. '내가 돈으로 산 시간'이라는 말은 시간의 주인의 언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산 시간을 쓰는 여러 방식 가운데, 사유의 시간은 가장 값지고 소중한 소비의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조용히 읽고 사유하는 시간은, 누구의 기념비에도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사진으로 남지도 않고, 매출표에 찍히지도 않는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에 내놓을 것이 없어 보이는 시간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바꾸고, 당신의 행동을 바꾸고, 당신의 습관을 바꾸고,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그런 당신이 주변에 영향을 주고, 주변을 바꾸고, 바뀐 주변이 세상을 바꾼다. 남의 속도를 내려놓는 동안 부하율은 줄고, 자기만의 해석이 자라는 동안 고유함이 채워진다. 그렇게 차오른 고유함은 한 자리에서 머물지 않는다. 밖으로 번진다. 고전에 이 순서를 먼저 본 사람들이 있었다. 동양의 고전 《대학》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일이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격물), 앎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치지), 뜻을 참되게 하고(성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정심)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네 걸음 모두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 조용히 읽고 생각하는 시간 안의 일이다. 백오십여 년 전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은 《미들마치》를 이렇게 맺었다. 세상의 선(善)이 자라는 것은 얼마간 역사에 남지 않는 행위들 덕분이고, 우리 삶이 이만큼이라도 괜찮은 것은 절반쯤은, 숨은 삶을 충실히 살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 잠든 이들 덕분이라고. 세상을 바꾸는 길은, 처음부터 기념비 없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함께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몸은 멈췄는데 마음은 여전히 남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멈춤이 아니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일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정말 '내가 구매한 시간'인지 알아볼 작은 표시 하나를 건네고 싶다. 구매한 시간에는 영수증이 남는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노트에 남은 문장 하나, 어제와 달라진 해석 하나, 조금 깊어진 숨 하나면 충분하다. 영수증은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챙기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되나?' 가 다시 올라올 때, 조용히 꺼내 보는 것이다. 그 영수증 앞에서,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뒤처져 있던 것이 아니라, 길을 다시 보고 있었구나." "더 달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도 되는 거였구나." 지난 글 「성공은 고통스러워야 한다?」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고통은 더 참으라는 신호가 아니라, 잠시 멈춰 길을 다시 보라는 신호라고. 그리고 다시 길이 보일 때까지 곁에 있고 싶다고. 오늘 이야기한 "고요"가, 바로 그 멈춤이다. 길은 달리는 동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멈춰 선 고요 속에서 다시 보인다. 그래서 나는 먼저 멈춰 보는 사람이고 싶다. 조용히 읽고 생각하며, 내 해석이 바뀌는 시간을 기꺼이 사는 사람. 그렇게 다시 길을 본 사람이 누군가의 곁에서도 "멈춰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고요가 곁에 앉은 한 사람을 덜 서두르게 하고, 덜 서두르게 된 그 사람이 또 다른 곁을 바꾼다. 이게 내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고 싶다. 함께 읽기 https://geekus.kr/consciousculturearchitect/post/16025 이 글의 제목을 제의해주신 강소라 대표님 감사합니다 🙏
사업이 잘돼도, 멈출 수 있습니까?
사업이 잘될수록, 지키고 싶은 하루 그가 바라는 하루가 조금씩 보였다 오늘 한 대표님과 새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었다. 새롭게 해보고 싶은 판매 방식도 꽤 구체적이었다. 미리 주문을 받고, 그만큼 준비하는 방식. 하루에 받을 주문을 정해두고, 직원들의 근무시간도 줄여보려는 구상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팔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들렸다. 그런데 대화를 나눌수록, 그가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지가 조금씩 보였다. 플랫폼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싶어 했다. 스스로 납득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그 안에서 고객과 직원도 행복했으면 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사업이 더 잘돼도, 처음 정한 기준을 지킬 수 있을까. 사업이 잘돼 주문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오는 날. 정해둔 수량을 다 팔았는데도 주문이 이어진다. 조금만 더 일하면 오늘 매출을 더 올릴 수 있다. 그때도 처음 정한 시간에 일을 마칠 수 있을까?? 주문을 더 받을 수 있는 순간에는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겠다 그렇게 늘어난 한 시간이 다음 달에는 기본 근무시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그 대표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볼 장면이다. 왜 하루에 이만큼을 준비하려는지? 그렇게 일하면서 우리가 함께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대표 자신이 이 사업을 통해 지키려는 삶은 무엇인가? 그 마음을 함께 볼 수 있는 원칙으로 적어두면 좋겠다고. 바쁜 날에도 꺼내볼 수 있도록. 물론 실제로 해보며 맞춰갈 일도 있다. 손님들이 그 주문 방식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찾아오는지, 비용을 치르고도 이익이 남는지. 바라던 만큼 근무시간이 줄어드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가 그리는 하루가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함께 확인해가고 싶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사람이 지키고 싶은 것을 함께 풀어보고, 그것이 일상에서 지켜지도록 구조를 세우는 일. 그 원칙을 직원도 이해하고 판단에 쓸 수 있다면, 대표가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순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자신의 사업에 질문 하나를 남겨보면 좋겠다. 사업이 두 배로 커져도, 나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이 지금의 일정과 운영 방식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살펴보자. 지키고 싶은 삶에도, 그것을 지킬 구조가 필요하다. 나에게도 지키고 싶은 미래가 있다. 내 시간과 가족을 지키면서, 사람들이 자기 기준으로 사업하도록 돕는 삶이다. 나는 그 모습을 100일 뒤 이미 이루어진 기사처럼 써두었다. 나의 ‘미래신문기사’다. 오늘 한 대표님과의 대화에서, 그가 사업을 통해 지키고 싶은 것을 들었다. 그 기준을 직원들과 어떻게 나눌지 함께 짚었고, 그 경험을 한 편의 글로 남겼다. 이제 이 하루를 내가 써둔 미래 앞에 놓아본다. 오늘 나는 이 미래신문기사의 어느 문장을 현실로 만들었는가? 오늘 나는 미래신문기사에 1% 이상 가까워졌는가? 내일 1% 더 가까워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시간관리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시간 자체는 관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관리라고 부르는 일은 사실 그 시간 안에서 주의가 어디로 새고 있는지 를 다루는 일에 가깝습니다. 일정표를 촘촘하게 짜고도 늘 시간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은 우선순위는 순서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일이 많을 때,일이 늘 역량보다 많다면, 진짜 질문은 무엇부터 할까? 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 입니다.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을 이기는 이유 사람들은 보상이 더 큰 중요한 일보다 마감이 임박한 급한 일을 고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급한 일은 금방 끝나고 끝냈다는 감각을 바로 주니, 손이 먼저 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결국 우선순위가 무너지는 건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고르는 순간에 긴급함이 판단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일을 놓치는 이유는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급한 일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중요도를 찾는 일은 우선순위의 한가운데 있지만, 그 앞에는 방향을 정하는 일이 있고 뒤에는 나머지를 내려놓는 일이 있습니다. 우선순위는 정하고, 찾고, 견디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무엇이 중요한가?"에서 - ”무엇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로 바꾸면 우선순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는 일을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라 전날 밤이나 한 주를 시작할 때 미리 정해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긴급함이 판단을 가로채지 못할때) 기준 1: 끝냈을 때 부하가 가장 많이 빠지는 일 이 일을 하면 다른 일이 쉬워지거나 아예 필요 없어지는가? 기준 2: 미룰수록 쌓이는 손해 ÷ 걸리는 시간 3. 견디기: 진짜 승부는 내려놓는 데서 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이 중요한지 이미 압니다. 앞의 긴급성 효과 실험에서도 사람들은 보상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한 일을 골랐습니다. 어려운 건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손대지 못한 일들이 주는 불안을 견디는 것입니다. 내려놓은 일마다 다시 볼 시점을 붙여 두면 그 불안이 훨씬 다룰 만해집니다. 각 4붐면의 역할 흔히 1사분면은 즉시 처리하고, 2사분면은 일정을 잡고, 3사분면은 위임하고, 4사분면은 없애는 방식으로 다룹니다. 2사분면에 시간을 쓰는 사람일수록 일을 앞서 대비하기 때문에 위기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미뤄둔 2사분면의 일은 결국 1사분면의 위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두 번째 습관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중요도 우선 2사분면을 지키려면 급해 보이는 수많은 요청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2018년의 긴급성 효과 연구는 그 거절이 왜 어려운지를 실험으로 보여줍니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시간 자체는 관리할 수 없습니다 다 할 수 없으니 골라야 하는 것이죠. 다만 시간과 에너지는 같은 방식으로 유한하지 않고, 그 차이가 전략을 바꿉니다.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를 관리하라 시간은 늘릴 수 없지만 에너지는 회복을 통해 다시 채우고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1시간도 어떤 에너지로 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정은 다 지켰는데 소진되는 날은 시간보다 에너지가 먼저 바닥난 날입니다. how 시간은 고릅니다 :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정하기 에너지는 맞춥니다 : 가장 중요한 일을 에너지가 가장 맑은 시간대에 배치하기 부하는 덜어냅니다 : 시간을 쓰지 않고도 에너지를 갉아먹는 미완료와 걱정 비우기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장자』 양생주 일은 끝이 없고, 시간과 에너지는 끝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어항이론-강사는 유리병에 주먹만 한 돌을 가득 채운 뒤 자갈과 모래, 물까지 차례로 부어 넣었습니다. 한 참가자가 애쓰면 언제든 더 끼워 넣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냐고 하자, 강사는 아니라며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큰 돌을 먼저 넣지 않았다면, 그 돌들을 넣을 수나 있었겠느냐고. 에너지 분배의 착각은 에너지를 시간처럼 다루는 데서 생깁니다 착각 1: 1시간을 나누면 1시간만큼의 에너지도 나뉜다 일정표의 1시간은 모두 같은 크기지만,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다릅니다. 다니엘 핑크는 『언제 할 것인가』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 동안 정점, 저점, 회복의 흐름을 탄다고 정리했습니다. 직전에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서도 남아 있는 주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일정보다 에너지 지도를 먼저 그려야 하고, 큰 돌은 그 지도의 정점에 넣어야 합니다. 착각 2: 에너지는 지금 하는 일에만 쓰인다 일정표에는 지금 하는 일 하나만 적혀 있지만, 에너지는 여러 곳으로 동시에 빠져나갑니다. 끝내지 못한 일, 미뤄둔 결정, 걱정이 일정표에 없는 채로 제 몫을 떼어 갑니다. 앞서 본 열린 고리와 주의 잔여가 바로 이 숨은 분배입니다. 100%를 쏟는다고 믿는 순간에도 실제로 그 일에 닿는 에너지는 그보다 적습니다. 착각 3: 에너지는 쓰면 줄어들기만 한다 의지력을 쓰면 바닥나는 연료로 본 '자아 고갈' 이론은 오랫동안 통념이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 23개 실험실이 참여한 대규모 재현 연구에서는 그 효과가 거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기결정성이론 연구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느끼는 일이 활력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높이고, 억지로 하는 일은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결과를 보여왔습니다. 에너지는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빠져나가기도 하고 채워지기도 합니다. 분배가 아니라 수지(收支)입니다 에너지는 잘 나누는 것만으로는 관리되지 않고, 새는 곳을 막고 채워 주는 일을 늘려야 합니다. '부하율을 비우고, 고유함을 채우다'의 두 동사가 이 양쪽에 그대로 대응합니다. 7은 하루 시간의 70%가 아니라 에너지의 70%입니다. 정점 구간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에너지를 담고 있어서, 필요한 시간은 하루의 70%보다 짧을 수 있습니다. 바쁜 1인 기업가에게도 이 법칙이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1은 흩어지는 순간 1이 아니게 됩니다. 3사분면을 들어오는 대로 처리하면 주의 잔여가 하루 전체로 번져 실제 몫이 커집니다. 저점에 모아서 처리해야 1로 유지됩니다. 7 안에는 회복과, 스스로 고른 의미 있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7은 에너지를 쓰기만 하는 구간이 아니라, 2와 1을 감당할 에너지를 다시 만들어 내는 구간이 됩니다. 타임블럭은 2사분면에 시간을 먼저 배정하는 일입니다. 깊은 작업 시간을 지켜 주고, 얕은 일은 묶어서 짧게 끝내게 해준다고 설명합니다. 앞부분이 7, 뒷부분이 1 비어 있는 시간은 결국 급한 일이 차지합니다. 블럭으로 먼저 점유해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어입니다. 블럭 3개만 넣고 버퍼가 없으면, 1사분면의 위기가 결국 2사분면 블럭을 깨고 들어옵니다. 2를 위한 빈 시간이 따로 있어야 7이 지켜집니다. 세 블럭을 고를 때의 에너지 원칙 가장 무거운 블럭을 정점에 : 블럭의 길이보다 그 시간대의 에너지 높이가 먼저입니다. 세 블럭 중 하나는 채우는 블럭으로 : 코비도 회복을 2사분면에 넣었듯, 운동·휴식·스스로 고른 배움처럼 에너지를 되돌려주는 블럭이 하나는 있어야 7이 스스로 유지됩니다. 블럭은 나와의 약속으로 : 3사분면 요청으로는 블럭을 옮기지 않고, 1사분면 위기만 버퍼에서 받습니다.

에너지 분배의 착각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를 나누는 7:2:1 법칙 들어가며 시간관리를 하다 보면 누구나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섭니다. 일은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켈리최 회장은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졌을 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가 고른 첫 행동은 계획표가 아니라 매일 밖으로 나가 걷는 일이었습니다. 김승호 회장도 세 번째 사업이 무너진 뒤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글은 그 질문의 답을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에서 찾습니다. 시간을 관리한다고 믿는 동안 실제로 새고 있는 것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WHAT: 에너지 분배의 착각이란 에너지 분배의 착각이란, 에너지를 시간처럼 나눠 쓸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시간과 에너지는 모두 유한하지만 유한한 방식이 다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으로 고정되어 있고, 에너지는 사람과 시간대에 따라 출렁이며 회복으로 다시 채워집니다. 토니 슈워츠와 캐서린 매카시는 2007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이 차이를 근거로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를 관리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장자는 그보다 훨씬 앞서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롭다고 경고했습니다(以有涯隨無涯 殆已). 일은 끝이 없고, 시간과 에너지는 끝이 있습니다. 착각은 세 가지 얼굴로 나타납니다. 착각 1. 1시간을 나누면 1시간만큼의 에너지도 나뉜다 일정표의 1시간은 모두 같은 크기지만,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다릅니다. 다니엘 핑크는 『언제 할 것인가』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 동안 정점, 저점, 회복의 흐름을 탄다고 정리했습니다. 그가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업무 수행 차이의 약 20%가 시간대 하나로 설명됩니다( 출처 ). 다만 이 흐름이 언제, 어떤 순서로 오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시간생물학에서는 이 차이를 크로노타입이라 부릅니다. 아침형과 중간형은 오전의 정점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넷 중 한 명꼴인 저녁형은 거꾸로 된 흐름을 탑니다. 유형 비율 하루의 흐름 종달새(아침형) 약 14% 정점 → 저점 → 회복 제3의 새(중간형) 약 65% 정점 → 저점 → 회복 올빼미(저녁형) 약 21% 회복 → 저점 → 정점 비율 출처 · 흐름 출처 구간마다 맞는 일도 다릅니다. 정점에는 분석적인 일이, 저점에는 단순한 행정 업무가, 경계심이 풀리는 회복 구간에는 오히려 창의적인 일이 잘 됩니다( 출처 ). 직전에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서도 남아 있는 주의가 달라집니다(리로이, 2009). 착각 2. 에너지는 지금 하는 일에만 쓰인다 일정표에는 지금 하는 일 하나만 적혀 있지만, 에너지는 여러 곳으로 동시에 빠져나갑니다. 끝내지 못한 일과 미뤄둔 결정, 걱정이 일정표에 없는 채로 제 몫을 떼어 가기 때문입니다(마시캠포·바우마이스터, 2011). 100%를 쏟는다고 믿는 순간에도 실제로 그 일에 닿는 에너지는 그보다 적습니다. 착각 3. 에너지는 쓰면 줄어들기만 한다 의지력을 쓰면 바닥나는 연료로 본 '자아 고갈' 이론은 오랫동안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나 2016년 23개 실험실이 참여한 대규모 재현 연구에서 그 효과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해거 외, 2016). 반대로 자기결정성이론 연구들은 스스로 고른 의미 있는 일이 활력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높인다는 결과를 보여왔습니다. 그래서 에너지는 분배가 아니라 수지(收支)입니다 착각 실제 처방 1시간 = 같은 에너지 시간대·직전 일에 따라 다름 배치 정한 일에만 쓰인다 미완료·걱정이 나눠 가짐 비우기 쓰면 줄기만 한다 어떤 일은 에너지를 채움 채우기 앞의 두 착각은 나가는 쪽, 마지막 착각은 들어오는 쪽에 대한 착각입니다. 새는 곳을 막는 것이 부하율을 비우는 일이고, 채워 주는 일을 늘리는 것이 고유함을 채우는 일입니다. WHY: 왜 중요한 일은 늘 밀리는가 중요한 일이 밀리는 이유는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서가 아니라, 고르는 순간 긴급함이 판단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 연설에서 어느 전직 대학 총장의 말을 빌려 "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결코 급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35년 뒤 스티븐 코비는 같은 통찰을 긴급성과 중요도라는 두 축의 네 칸 매트릭스로 정리했습니다. 2018년의 한 연구는 이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상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감이 임박한 일을 먼저 골랐고, 그 마감이 별 의미 없을 때조차 그랬습니다(단순 긴급성 효과). 이 연구가 소비자 연구 학술지에 실린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만 할인'에 지갑이 열리는 심리와 급한 일에 손이 가는 심리는 같습니다. 코비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에 실은 큰 돌 이야기도 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유리병에 주먹만 한 돌을 채운 강사가 자갈과 모래, 물까지 부어 넣자, 한 참가자는 애쓰면 더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교훈을 떠올렸습니다. 강사는 아니라며, 큰 돌을 먼저 넣지 않았다면 그 돌들을 넣을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7:2:1 에너지 분배 법칙 7:2:1 에너지 분배 법칙은 이 매트릭스의 네 칸에 에너지를 나누는 비율입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에 7, 중요하고 급한 일에 2,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에 1, 둘 다 아닌 일에 0을 둡니다. 시간 대신 돈의 언어로 바꾸면 네 칸은 투자, 지출, 소비, 낭비가 됩니다. [embed: node/a0006b0e-2faf] 2사분면의 7에는 전략과 관계뿐 아니라 휴식도 들어가고, 4사분면은 0으로 비웁니다. 숫자에는 토대가 있습니다. 코비는 데밍상을 받은 우수 조직들이 관리 시간의 65~80%를 2사분면에 쓴 반면, 일반 조직은 15% 안팎에 그쳤다는 연구를 소개합니다( 출처 ). 다만 코비는 시간을 재고, 7:2:1은 에너지를 나눈다는 점이 이 법칙의 고유한 지점입니다. 7은 규칙이어야 합니다 : 투자는 늦게, 복리로 돌아옵니다. 노후 저축이 늘 밀리듯 2사분면도 밀리기 때문에, 비율을 미리 정해 두는 것 자체가 투자를 지키는 장치입니다. 2는 7의 결과입니다 : 2사분면에 미리 투자할수록 예방이 쌓여 1사분면의 위기가 줄어듭니다. 정기 점검을 미룬 집이 수리비를 더 쓰는 것과 같습니다. 1은 0이 될 수 없어서 1입니다 : 1인 기업가가 3사분면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소비는 대개 남이 고른 장바구니라서, 모아서 한 번에 치러야 1로 묶입니다. 0은 4사분면의 자리입니다 : 4사분면은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휴식이 아니라 도피입니다. 진짜 휴식은 2사분면, 곧 7 안에 들어갑니다. 돈의 언어가 잘 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쓰고, 아끼고, 낭비하고, 투자한다고 말합니다(레이코프·존슨, 『삶으로서의 은유』). 그런데 벌고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돈에 더 가까운 것은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라서, 7:2:1은 '에너지 가계부'라고 부를 때 가장 정확합니다. HOW: 에너지 가계부를 쓰는 법 에너지 가계부는 지도를 그리고, 투자분을 먼저 떼어 두고, 휴식을 정확히 정의하고, 기록하는 네 단계로 씁니다. 1. 내 에너지 지도부터 그립니다 에너지 지도는 남의 하루가 아니라 내 크로노타입 위에 그려야 합니다. 알람 없이 자는 날, 잠든 시각과 깬 시각의 한가운데가 새벽 3시 30분에서 5시 30분 사이면 중간형, 그보다 이르면 아침형, 늦으면 저녁형에 가깝습니다( 출처 ). 일주일간 시간대별 컨디션을 기록해 겹쳐 보면 나의 정점이 보입니다. 출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인과 달리, 1인 기업가는 하루의 배치를 자기 크로노타입에 맞출 수 있는 드문 위치에 있습니다. 2. 투자분 7을 먼저 떼어 둡니다 개인 재무의 오랜 원칙인 '선저축 후지출'은 월급이 들어오면 저축부터 떼어 두라는 것입니다. 에너지 가계부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타임블럭입니다. 드러커는 성과를 내는 사람은 할 일이 아니라 시간에서 출발한다고 했고, 칼 뉴포트는 타임블로킹이 깊은 작업 시간을 지키고 얕은 일은 묶어 준다고 설명합니다( 출처 ). 제이코치는 고성과자에게 공통으로 있는 타임블럭으로 생각, 발전, 에너지(잠)의 세 가지를 꼽고, 30분씩 세 번 하는 '33 공식'으로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이 세 블럭은 7의 기반층입니다. 여기에 사업의 큰 돌을 굴리는 핵심 블럭을 정점에 얹어야 7이 완성됩니다. 층 블럭 배치 기반층 에너지: 잠, 30분 더 전날 밤 기반층 생각: 걸으며 정리 정점 직전 핵심층 사업의 큰 돌·관계 정점 기반층 발전: 독서·글쓰기 회복 구간 코비는 이 균형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 우화로 설명했습니다. 황금알(성과)만 좇으면 거위가 죽고, 거위(생산 능력)만 돌보면 알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반층이 에너지를 만들고, 핵심층이 그 에너지를 성과로 바꿉니다. 기반층의 블럭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2주 동안 하루 6시간씩 잔 사람들의 인지 수행은 밤을 하루에서 이틀 꼬박 샌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본인들은 그만큼 졸리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반 동겐 외, 2003). 미국수면의학회와 수면연구학회가 성인에게 꾸준히 하루 7시간 이상을 권하는 이유입니다. 걸을 때는 앉아 있을 때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평균 60%가량 더 많이 나왔습니다(오페초·슈워츠, 2014). 스스로 고른 배움은 활력을 높이는 활동에 속합니다(자기결정성이론). 2와 1의 자리도 정해 둡니다. 2는 블럭 사이에 비워 둔 버퍼로 받아야 1사분면의 위기가 7을 깨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1은 저점에 모아서 한 번에 처리하고, 0은 잊고 있던 구독료처럼 해지합니다. 3. 휴식을 정확히 정의합니다 휴식이란 소모된 곳을 내려놓고, 에너지가 다시 자라나게 하는 시간입니다. 休는 사람이 나무에 기대 모습이고, 息은 숨이면서 '자라다, 불어나다'라는 뜻도 지녀 이자를 뜻하는 이식(利息)에도 쓰입니다. 휴식은 글자 그대로 기대어 숨을 고르는 동안 다시 불어나는 것, 곧 이자가 붙는 투자입니다. 『맹자』의 우산(牛山) 이야기는 이 정의를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날마다 도끼에 베이는 산에도 밤낮으로 자라나는 것(日夜之所息)이 있어 새싹이 돋지만, 소와 양을 풀어 놓으니 그마저 뜯어먹혀 민둥산이 됩니다. 쉬는 시간에 돋은 새싹을 자잘한 자극이 뜯어먹는 모습, 그것이 오늘날의 도피입니다. 무엇이 휴식인지는 일이 정합니다. 노력-회복 모델에 따르면 회복은 일하느라 쓴 기능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지식노동은 몸은 쉬고 뇌는 일하는 칸에 있어서,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것은 자세만 바뀜 일입니다. [embed: node/a78f1767-983a] 제이코치의 세 블럭 가운데 생각 블럭이 지식노동의 대각선 반대 칸에 있어, 짧은 시간에 가장 큰 회복을 줍니다. 쉬는 시간을 회복으로 만드는 경험은 네 가지입니다(조넨탁·프리츠, 2007). 일에서 마음까지 떠나는 분리, 긴장이 풀리는 이완, 새로운 것을 배우는 숙달, 무엇을 할지 스스로 정하는 통제입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주지 못하는 시간은 아무리 편해도 도피에 가깝습니다. 판별은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채워졌는가, 더 비었는가? 채워졌다면 7에, 비었다면 0에 속합니다. 4. 4주 동안 기록합니다 매일 정점 구간이 어느 사분면에 쓰였는지 한 줄씩 기록합니다. 정확히 7:2:1이 최적이라는 연구는 아직 없으니, 이 법칙은 직접 검증할 가설로 다루는 편이 정직합니다. 4주 동안 7에 가까워질수록 무엇이 달라지는지 보여줄 수 있다면, 그때부터 법칙은 근거를 갖습니다. 맺으며 에너지를 아끼는 법은 덜 쓰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지 않는 것입니다. 『장자』의 포정은 19년 동안 소 수천 마리를 잡고도 칼날이 막 숫돌에 간 것처럼 새것이었습니다. 보통 백정은 뼈를 내리치느라 달마다 칼을 바꾸었지만, 포정은 뼈마디 사이의 틈을 따라 칼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7:2:1은 그 틈을 미리 내 두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7의 에너지는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답은 내가 멈춰도 일하는 곳입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성공은 고통스러워야 한다?
- 고통이 길이 되려면 돌아보면 아프지 않고 지나온 성장은 없었다. 낯선 일 앞에서 작아졌고, 거절당했고, 기다렸고, 익숙했던 나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이 성공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팠다고 해서 모두 길이 되지는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문제로 몇 번이고 아팠던 시간도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노력이라고 불렀다. 지금 보면 그저 맴돌고 있었다. 고통은 성공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고통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 둘 사이에서 많은 사람이 길을 잃는다. "성공한 사람은 아팠다"는 말을 오래 듣다 보면, 어느새 "아프면 성공한다"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아플수록 더 가까워진다고 믿게 된다. 잠을 줄이고, 쉬는 날에도 마음은 쉬지 못하고, 몸이 보내는 신호마저 성실함이라고 부른다. 일이 잘 풀리는데 오히려 불안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너무 쉽게 된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이 약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파야만 누려도 된다고 배워 온 사람의 말이다. 오래 견디는 법은 배웠지만, 견디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고통을 줄이는 방법부터 건네고 싶지는 않다. 먼저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이 그동안 아팠던 것은 잘못 살아서가 아니다.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다만 함께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의 고통이 나를 앞으로 데려가는 고통인지,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하는 고통인지? 앞으로 데려가는 고통은 지나고 나면 내가 조금 넓어져 있다. 맴도는 고통은 지나고 나도 같은 자리에 같은 무게로 남는다. 그런 고통은 더 참으라는 신호가 아니라, 잠시 멈춰 길을 다시 보라는 신호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조금 다르게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부족해서 아팠던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혼자 오래 돌고 있었구나." "더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바꿔도 되는 거였구나." 고통이 길이 되는 것은 얼마나 아팠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바꾸었느냐에 달려 있다. 고통 속에서도 다시 선택할 수 있을 때, 아픔은 비로소 길이 된다. 지금 당신의 고통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더 견디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아픔을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도 아니다. 대신 먼저 알아봐 주고 싶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는지. 그리고 함께 보고 싶다. 그 아픔이 어디서 맴돌고 있는지. 다시 길이 보일 때까지, 곁에 있고 싶다. 엉킨 마음이 풀리고 삶이 다시 서는 일은, 아마 거기서부터일 것이다. 이 글의. 영감을 주신 인혜님 감사합니다 🙏

완벽해지려고 할수록, 왜 나를 좋아하기는 더 어려워질까요?
나를 위해 시작한 습관이 어느 순간 나를 다그치는 숙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삶을 잘 돌보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빠뜨리면 안 돼.’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해.’ 라는 생각이 붙기 시작합니다. 삶을 돌보기 위해 만든 일이 언제부터 지켜내야 할 또 하나의 기준이 된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계획대로 해낸 날에는 나름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루만 흐트러져도 그동안 해온 것은 보이지 않고 오늘 못 한 것만 크게 보입니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나를 좋아하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완벽주의를 이야기할 때 이 질문을 먼저 봅니다. “나는 잘해낸 나에게만 내 편이 되어주고 있는 걸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성과를 높이기 위한 기준이 어느 순간 나를 인정하기 위한 조건 까지 되어버릴 때입니다. 잘해야 괜찮은 사람. 꾸준해야 괜찮은 사람. 흔들리지 않아야 괜찮은 사람. 이런 조건이 붙기 시작하면 지친 날이나 실수한 날에는 스스로를 인정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무언가를 해내도 오래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잘한 것보다 다음 부족한 것이 먼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을 위한 점검이 어느 순간 나를 계속 탈락시키는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온전함’ 이라는 말을 함께 생각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한 나도 나이고, 실수한 나도 나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자신 있게 결정했던 모습도, 겁이 나 망설였던 모습도, 꾸준히 해온 시간도, 중간에 놓아버린 시간도 모두 내 삶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대신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려워하는구나.” “이 부분은 아직 연습이 필요하구나.” “지금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넘겼구나.”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에는 고칠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정을 잡을 때 확인할 시간을 빼놓았다’에는 고칠 행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속한 자료를 하루 늦게 전달했다고 해보겠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무책임하지?” 라고 자신을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비난한다고 해서 상대방의 불편이 줄어들거나 다음 약속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구체적인 일입니다. 자료 전달이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사과하고, 새로운 전달 시간을 알립니다. 그다음 살펴봅니다. 준비 시간을 잘못 예상했는지, 확인 과정이 빠졌는지, 일정을 너무 많이 잡았는지. 행동에는 책임을 지되, 그 행동 하나로 나 전체를 평가하지 않는 것. 저는 이것 역시 온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함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며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내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자꾸 놓치는 부분이 있다면 확인 장치를 만들고, 일정이 빠듯하면 미리 조율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자기비난보다 자기이해가 때로는 훨씬 더 많은 책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가 지키려고 하는 원칙 중 하나는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입니다. 잘했을 때만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흔들렸을 때도 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루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날의 나를 심판하는 대신 살펴봅니다. 계획이 과했는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지? 우선순위를 바꿀 필요가 있었는지? 그리고 내일 다시 이어갈 행동 하나를 정합니다. 계획을 잘 지킨 나에게 보내던 관심을, 계획을 놓친 나에게도 써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앞으로는 절대 나를 탓하면 안 돼.’ 라는 규칙을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완벽주의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또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 순간부터 구체적으로 보면 됩니다. 오늘 자신을 탓했던 장면이 있다면 세 가지만 적어보세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일을 두고 나는 나에게 어떤 평가를 붙였는가. 지금 내가 책임지고 바꾸거나 도움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일정을 놓쳤다’ 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다’는 다릅니다. 사실과 자기평가를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오늘 부족했던 것을 고치는 동안에도 그동안 해온 노력과 잘해낸 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잘한 나만 데리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흔들리는 나까지 데리고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완벽해지는 것보다이쪽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잘할 때만이 아니라, 흔들릴 때도 내 편이 되어주는 것. 어쩌면 "온전함"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모습의 나도 버리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힌트를 주신 도은(키미)님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출구를 안내하기 전에
나는 위로를 잘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내 안의 해결사가 먼저 튀어나온다.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는다. 상대를 돕고 싶은 마음인데도 대화는 자꾸 설명으로 새어나간다. 아마 내가 배운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밑바닥에서 일어선 부모님은 내가 강하게 자라기를 바라셨다. 우리 집에서 사랑은 다정한 말보다 생존하는 힘에 가까웠다. 힘들면 견뎌야 했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고통 앞에 함께 머무는 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오늘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러니 “네 마음을 다 알아”라는 말은 어쩌면 위로가 아니라 오만일 수 있다. 위로의 시작인 인정은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내가 모른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고통까지 부정하지 않는 태도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이 일이 당신에게 가볍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은 출구를 안내받기 전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봐주길 원한다. 아무도 감옥을 보지 못하는데 혼자 출구 이야기만 듣는다면, 그 해결책마저 또 하나의 짐이 된다. 지친 사람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부하가 가득한 사람에게 새로운 루틴을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방법도 받아들일 여백이 없으면 또 하나의 할 일이 된다. 그래서 순서가 필요했다. 보고, 머물고, 묻고, 돕는다. 먼저 그 사람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본다. 당장 꺼내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함께 머문다. 내가 짐작한 것이 맞는지 묻는다. 그리고 상대가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출구를 함께 찾는다. 나는 사람들의 엉킨 마음을 풀고, 자기 천명을 발견해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도록 돕고 싶다. 그 과정에서 부하를 줄이고 판단의 기준을 되찾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해왔는지 알아봐주는 일이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보지 못한 채 달리고 있다면, 잠시 멈춰 함께 벽을 살펴보는 일이다. 불안은 사람의 시야를 좁힌다. 위험과 실패만 보이게 하고, 이미 곁에 있는 가능성과 선택지는 보이지 않게 만든다. 이때 위로는 문제를 대신 해결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의 경계를 조금 풀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단서가 눈에 들어올 여백을 만든다. 나는 이것을 RAS를 함께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현실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주의를 깨우는 것이다. “나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었구나.”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안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이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기 출구를 찾기 시작한다. 위로는 고통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다정함도 아니다. 위로는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안전하게 바라보고, 다시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시야를 밝혀주는 일이다. 나는 이제 출구를 잘 설명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봐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의 마음을 풀고 삶을 세우는 일은, 어쩌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결핍이 만족을 낳는다고?
책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멈췄다. “결핍이 만족을 낳아. 풍요가 만족을 낳는 것은 아니야.” 처음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맛있고,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이 달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방에 들어오면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온기가 온몸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결핍이 만족을 만든다는 말은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 결핍이 만족을 만드는 걸까? 가난한 사람이 모두 만족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외로운 사람이 사랑을 더 잘 느끼는 것도 아니다. 결핍이 오래되면 사람은 오히려 불안해진다. 돈이 부족하면 돈에 집착하고,사랑이 부족하면 사랑을 확인하려 하고,인정이 부족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결핍 자체가 만족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만족을 만들까? 결핍이 만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핍과 충족 사이의 ‘대비’가 만족을 깨운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밥이 달았고, 추웠기 때문에 따뜻함을 알아차렸고, 멀리 떠나봤기 때문에 집의 편안함을 알게 된 것이다. 없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없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결핍’과 ‘결핍감’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핍은 상태다. “지금 배가 고프다.” “지금 돈이 부족하다.”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 결핍감은 해석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조금만 더 가져야 행복할 것 같아.” “나는 아직 멀었어.” 둘은 전혀 다르다,결핍은 충족되면 끝난다. 결핍감은 충족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100만 원을 벌면 1,000만 원이 부족하고, 1,000만 원을 벌면 1억이 부족하다. 팔로워가 만 명이면 십만 명을 바라보고,십만 명이 되면 백만 명을 바라본다. 그래서 풍요로운데도 부족할 수 있다.반대로 가진 것은 많지 않은데 충분할 수도 있다. 만족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 지금 가진 것을 얼마나 느낄 수 있느냐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가끔 결핍이 필요하다. 강요된 결핍이 아니라 선택한 결핍이다. 굶주리는 것과 잠시 단식하는 것은 다르고, 돈이 없는 것과 소비를 멈춰보는 것은 다르고, 고립되는 것과 휴대폰을 내려놓는 것은 다르다. 잠시 불편함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 그러면 평소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나타난다. 따뜻한 물. 한 끼의 밥. 편안한 침대. 나를 기다리는 사람. 오늘도 움직이는 몸. 우리는 새로운 것을 얻어서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잠시 멀어져 봐야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의 구조를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 결핍 → 대비 → 음미 → 충분함 → 만족 행복의 반대는 가난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의 가장 큰 적은 “아직 부족하다”는 감각에 너무 익숙해져 이미 충분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결핍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결핍을 지나 풍요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만족은 더 많이 갖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느끼는 순간 시작된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풍요가 아니라,풍요를 느끼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중독은 사명의 위조품이다
상담에서 가장 늦게 나오는 이야기는 대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고백은 이제 자랑처럼 들리고, 퇴근 후 몇 시간씩 휴대전화를 넘기는 습관은 휴식이라 불린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그것을 하루 못 하게 되면 먼저 오는 것이 아쉬움입니까?괴로움입니까? 아쉬움이라면 그것은 좋아하는 일이다. 괴로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면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중이다. 중독을 욕구가 너무 강한 상태로 보면 처방은 늘 같다. 참아라, 끊어라. 그러나 중독은 욕구의 양이 아니라 구조가 뒤집힌 상태다. 뇌에서 원하게 만드는 회로와 좋다고 느끼게 하는 회로는 따로 있고, 반복할수록 원함만 예민해진다. 별로 좋지도 않은데 자꾸 손이 가는 상태가 여기서 나온다. 몸은 그사이 반대 방향으로 적응한다. 처음의 쾌감은 약해지고 뒤따르는 허전함은 커져서, 결국 기분의 바닥 자체가 내려간다. 이제 그것은 기쁨을 주지 않는다. 겨우 0으로 돌려놓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마저 습관에게 자리를 내준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하고 있다. 좋아서 시작해, 괴로워서 계속하고, 저절로 하게 되는 것. 중독은 쾌락이 아니라 안도를 산다.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끊을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끄고 있는지다. 중독은 문제이기 전에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피로를 끄는 사람, 외로움을 끄는 사람, 불안을 끄는 사람, 공허를 끄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대상을 고른다. 끄던 고통을 그대로 둔 채 대상만 빼앗으면 고통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술을 끊은 사람이 일에 매달리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진통제만 바꿨기 때문이다. 자리도 중요하다. 베트남에서 헤로인에 중독되었던 병사들 가운데 귀국 후 1년 안에 다시 중독된 사람은 스무 명에 한 명꼴이었다. 중독은 사람 안에만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도 있다. 상담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중독은 병원에서 부르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일과 성취, 인정, 끝없는 자극이다. 이것들은 대개 좋은 이름을 입고 온다. 책임감, 열정, 영향력, 정보 수집. 일중독과 몰입은 같은 시간을 일해서 겉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몰입한 사람은 재미있어서 일하고, 일중독인 사람은 해야 해서 일한다. 차이는 멈추는 날 드러난다. 성실함의 옷을 입은 중독은 칭찬을 받기 때문에 가장 늦게 발견된다. 중독이 왜 그렇게 강한지 오래 생각했다. 내 답은 이렇다. 중독은 채점표를 하나로 줄여 준다. 라스베이거스의 기계 도박꾼들을 오래 관찰한 한 인류학자는 그들이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시간과 돈과 사람들의 요구가 모두 사라지는 구간에 머무는 일이었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 채점표의 개수라면, 모든 채점표를 한꺼번에 꺼 주는 것만큼 강한 진통제는 없다. 그런데 채점표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사명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은 한동안 같은 느낌을 준다. 편안하고, 몰두하게 되고, 삶이 단순해진다. 차이는 하나가 되는 방식에 있다. 사명은 채점표를 합치고, 중독은 채점표를 끈다. 합쳐진 기준은 한 방향으로 정렬되지만, 꺼 둔 기준은 사라지지 않고 이자를 붙여 돌아온다. 중독을 사명의 위조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말은 거꾸로도 읽어야 한다. 진짜 사명도 마약이 될 수 있다. 사명 말고는 즐거운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하루를 쉬면 회복이 아니라 불안이 올 때, 사명 때문에 미뤄 둔 사람의 목록이 길어질 때, 사명은 채점표가 아니라 진통제가 된 것이다. 열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조화로운 열정과 구분해 강박적 열정이라 부른다. 좋은 사명은 원천을 하나로 좁히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관계와 즐거움이라는 원천을 여럿으로 늘릴 이유가 되어 준다. 그래서 나는 사명을 찾은 고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그것을 하루 멈추면 무엇이 옵니까. 아쉬움입니까, 괴로움입니까.
우리는 미래를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통제는 미래를 붙잡고, 관리는 미래 속에서 나를 지킨다.
우리는 미래를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불안하면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사업이 잘될지? 돈이 얼마나 필요할지? 이 사람과 계속 함께해도 될지?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숫자를 확인하고, 계획을 세우고, 경우의 수를 만든다. 계획이 부족하면 계획을 더 만들고, 그래도 불안하면 통제를 시작한다. 사람을 통제하고, 일정을 통제하고, 돈을 통제하고, 변수까지 통제하려 한다. 미래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안전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모순이 있다. 우리는 미래를 통제할 수 없는데, 미래를 통제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오늘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몇 달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당시에는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몇 년 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있기도 한다. 사업도 그렇다. 우리는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떤 고객이 찾아올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떠날지 모르고, 어떤 기회가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모르는 것을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묻는다. “이거 하면 성공할까요?” “사례가 있나요?” “얼마나 확률이 높습니까?” “결과가 보장됩니까?” 물론 확인은 필요하다. 숫자도 보고, 사례도 보고, 위험도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확인은 판단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의식이 된다.100% 확신이 생길 때까지 계속 증거를 찾는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지 않는다. 미래는 원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통제와 관리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제는 미래를 내 뜻대로 만들려는 것이다. 관리는 미래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 통제하는 사람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관리하는 사람은 묻는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통제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있다. 관리의 중심에는 신뢰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오히려 반대다. 계획을 세워야 한다. 돈을 관리해야 한다.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그 구조의 목적이 달라야 한다 . 미래를 붙잡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미래가 달라져도 나를 지키기 위한 구조여야 한다. 나는 이것이 진짜 관리라고 생각한다. 사업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돈이 예상보다 적게 들어와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사람이 떠나더라도 내 가치까지 함께 무너지지 않는 것. 계획이 틀어져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중요한 능력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정말 모든 것을 알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멸종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도 매일 아침 눈을 뜬다. 아이를 낳고, 사업을 시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결과를 알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모르지만 시작한 일들이다. 톨스토이는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사랑에서 찾았다. 나는 그 문장을 조금 다르게 읽었다. 사람은 미래를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미래 속에서도 누군가를 믿고, 자신을 믿고, 다시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불안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더 많이 알아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만드는 것이다. 통제는 미래를 바꾸려 하고, 관리는 미래가 달라져도 나를 지킨다.그리고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삶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다시 풀 수 있으며,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어쩌면 충분함이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아니, 그래서 우리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