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사는 '풀다'였다 -(천명 찾는 법을 나에게 실험해 보았다)
지난 글에서 천명 찾는 법을 썼다.
탄식 속에 단서가 있고, 과거를 관통하는 날실은 동사로 표현되며, 찾았다는 시그널은 근심을 잊게 하는 몰입이라고.
쓰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그래서 너는 찾았느냐고??
글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도리가 없었다.
그 방법을 나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그 실험의 기록이다.
먼저 날실.
과거를 뒤져 일관된 것을 찾으라고 했으니, 어린 시절부터 뒤졌다.
나는 세상의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수
정해골 같은, 역사가 설명하지 못하는 미스터리들.
커서는 고고학과 지리학과 식물학을 기웃거렸다.
겉으로는 다 다른 관심사지만 지금 보니 하는 일이 같았다.
흩어진 증거를 모으고,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찾고, "왜?"를 끝까지 파고드는 것.
아마 나는 세상이 혼돈이 아니라 질서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내 소개는 한 문장이면 된다.
나는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한다.
다음은 탄식.
나를 가장 자주 탄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뜻밖에 금방 나왔다.
"왜 사람들은 자기 길을 모른 채 평생 방황할까?"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더 오래된 문장이 하나 깔려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방향만 알려주었다면.
지난 글의 공식대로라면 이 탄식은 결핍의 기록이 아니라, 대임(大任)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확신은 끝내 내 안에서 오지 않았다.
상대의 입에서 왔다.
지인과 긴 대화를 나누며 함께 그의 인생을 파 내려가던 날,
어느 지점에서 그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내가 이걸 하려고 태어났구나!"
그날 나는 먹는 것을 잊었다.
하늘은 말하지 않고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한다더니, 그 순간 내 동사의 족보가 한눈에 보였다.
파다, 풀다, 그리고 같이 풀다.
사물의 수수께끼를 풀던 아이가 어느새 사람이라는 가장 깊은 수수께끼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답은 그 사람 안에 봉인되어 있고, 나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봉인을 함께 여는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 나름의 원리도 하나 생겼다.
사람이 방황하는 이유는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중심이 밖에 나가 있어서라는 것.
의존이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삶의 판단 기준을 바깥에 맡긴 상태이고, 그래서
성장이란 능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외부에서 내면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라는 것.
적어 놓고 보니 낯익었다.
중용의 첫 문장이 이천 년도 더 전에 같은 말을 해 두었다.
하늘이 명한 것은 곧 내 본성 — 중심은 처음부터 밖에 있었던 적이 없다.
요즘은 네 번째 동사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세우다.
주인공 뒤에서, 조용히, 사람을 세우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고유함을 찾은 사람들이 서로를 세우는 생태계를 짓는 것.
나만의 특별함은 타인을 빛나게 할 때 완성된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살아가며 검증할 가설이다.
검증 질문은 이미 정해 두었다.
오늘 나는 누구의 봉인을 풀었나?
그날 나는 먹는 것을 잊었나?
탄성이 쌓이면 가설은 천명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도 같은 실험을 권한다.
당신의 과거를 관통하는 동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동사가 일하는 순간, 당신은 무엇을 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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