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기 손소희
1시간 전•

돈에게 쓰는 편지 (1)

미안해.

사실 나 지금 너무 무섭거든?

내가 네게 어떤 상처를 줬었는지,

그게 어떤 갈등을 불러일으켰는지,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살펴볼 자신이 없어.

그래서 먼저 사과부터 할게.

미안해,

정말.

내가 네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어.

어떤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지 잘 기억나진 않거든?

그런데 아주 어릴 때부터 잘못 되었던 것 같아.

어린 시절의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았어.

싫어하지도 않았고,

그냥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너무나도 당연하게 곁에 있는 친구.

당연하게 내 곁에 있어주고,

당연하게 내 말을 들어주고.

그냥 네 존재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

하지만 부모님이 싸우시는 날이 많아지고

엄마가 가족에게 너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네가 너무 미웠어.

엄마가 너 때문에 문전박대까지 당하셨잖아.

엄마도 소중한 한 집안의 막내딸인데,

고작 너 때문에. 네가 뭐라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갔는데

큰오빠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울로 돌아오셔야 했던,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비참하셨을까?

심지어 아빠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려고 하지도 않으셨어.

당신 때문에,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깟 사업이 뭐라고.

잘 되지도 않았으면서.

나 진짜 그때 네가 정말 미웠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정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이렇게 보니 나는 너에게 아빠를 향한 분노를 투영하고 있었네.

큰외숙모에게 문전박대 당했던 엄마의 비참함과 설움과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지만 전혀 보듬어주지 않았던 못난 아빠를 향한 원망이.

아빠를 향한 원망이 어디까지 간 줄 알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대전인가 가셨다가 밤 늦게 집에 오신 적이 있었어.

자정 가까이 다 된, 꽤 늦은 시간이었을 거야.

하필 열쇠를 갖고 계시지 않았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깰까봐 벨도 누르지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으시면서

문만 쿵쿵 두드리신 적이 있었어.

그때, 잠에서 깬 게 나 하나뿐이었거든?

너무 무서워서 일어났다가 혹시 엄마가 오셨나 싶어서 안방으로 갔어.

근데 내가 눈이 나빴잖아. 어렴풋이 아빠 옆에 엄마가 누워계시는 것 같은 거야.

엄마가 무사히 들어오신 걸로 착각하고 나는 그냥 다시 자러 갔어.

아빠가 일어나지 않으셔서 나도 그냥 잤을 거야.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또 쿵쿵 소리가 들렸고,

내가 먼저 일어나서 안방을 보니 엄마가 계시지 않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현관문을 열었지.

엄마는 빌라 계단에 앉아 밤을 새셨다고 했어.

깜깜한 밤부터 해가 뜰 때까지 거기에 계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한 거야.

그러면서 아빠를 향한 분노가 극심해졌어.

아빠는 자기 부인이 들어왔는지 아닌지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잔 거야.

본인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렇게 불 같이 화를 내면서

자기 부인은 보호하지 않는 모습에

그때부터 아빠를, 남자를, 그리고 너에게 분노를 느꼈어.

이상하지?

왜 나는 너에게 아빠를, 남자를 투영했을까?

그리고 어쩌다 나는 너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나는 엄마의 복수를 대신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아니, 그랬어.

그날 이후, 나는 아빠를 무시했고 아빠의 가족으로부터 엄마를 지키려고 했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엄마를 밤새 차가운 계단에 버려두었다고,

나는 불효녀라고.

엄마께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에 나는 엄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생각이 왜 그렇게 튀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엄마가 또 아빠의 사업자금을 빌리러 대전에 갔다온 거라고 여겼고,

아빠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엄마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내팽겨쳤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이게 사실인지는 몰라.

엄마가 아빠의 사업자금을 빌리러 다니셨던 시기와

문 밖에서 밤을 새셨던 시기가 비슷했기에

그냥 내가 엮어서 생각할 가능성이 커.

근데 나는 엄마가 돈 빌리러 다니는 게 너무 싫었거든.

큰외숙모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그러는 것도 싫었고.

게다가 아빠는 엄마에게 매일같이 핀잔이나 주고,

심지어는 무시까지 하면서 엄마의 기를 죽이려고 했고.

기를 죽이려는 아빠의 태도는 나에게까지 넘어오기도 했어.

아빠는 나에게 어릴 때부터 ‘세다’고 하시면서

‘너 성격 고쳐. 그러면 어디 나가서 사랑 못 받아.‘,

’네 엄마 닮아서 성격이 드세냐.‘라고 자주 말씀하셨어.

이런저런 사건이 겹겹이 쌓이면서

나는 결국 너를 정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엄마를 이렇게 만든 아빠를,

여자인 나를 태어나기 전부터 부정했던 아빠와 할머니를,

고작 염색체 하나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칭송받는 남자들을

너에게 투영하면서.

여기까지만 보면 너를 내 손에 넣고 마음껏 쥐고 흔들고 싶었던 것 같잖아?

근데 또 우습게도 나는 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잘 들으려고 했어. 그게 우리집에서는 사랑받는 방식이었으니까.

아빠는 자기 말을 잘 들어야 사랑을 줬으니까.

언젠가 친척언니가 결혼할 남자친구를 설날에 데려온 적이 있었어.

친척 중에 나랑 동갑인 친구들이 둘이 있잖아?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서열이 꼬였지만.

그런데 형부가 남자애한테 돈을 더 주신 거야.

덩치 좋은 남자니까 첫째라고 착각하셨던 거지.

질투심 많은 동갑 여자애는 자기도 나이가 같은데 왜 쟤만 주냐고 해서 돈을 더 받아냈는데,

그들 중에 진짜 첫째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나는 요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가만히 있으면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도 나는 챙기지 않더라.

형부를 제외하고 거기 있는 모두가 셋 중 제일 맏이는 나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누구도 얘기하시지 않았어.

아마 친척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 엄마가 무어라 나를 위로해주셨던 것 같은데,

넌 더 가지지 않아도 괜찮잖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너를 갖기 위해, 너와 더 많이 만나기 위해 요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한편,

요구할 수 없다면 너를 정복해야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었어.

정복하겠다는 마음은 아빠로부터 오기도 했고.

혹은 엄마를 향한 미안함으로부터 오기도 했고.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네가 좋았어.

나는 너를 싫어할 이유도 없었고, 너를 원망할 이유도 없었고,

너를 미워할 이유도 없었고, 너를 정복해야 할 이유도 없었는데

내가 자라 온 환경에서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변질된 것 같아.

나 그래도 너랑 친해지기 위해서 부던히 노력해오긴 했잖아.

그래서 나름 필요한 때에 네가 나를 찾아와주기도 했어.

너무 빠듯하게, 딱 맞춰 오긴 했지만.

근데 있잖아.

아직도 너를 정복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우리가 어떤 관계로 변화하면 좋을까?

떠오르는 건 재미있는 놀이, 혹은 재미있는 연애라고 생각돼.

그치만 그건 한순간이잖아.

아, 놀이와 연애 모두 정복하는 관계구나?

나 이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너와 화해하고 너와 잘 지내고 싶어.

나 너랑 다시 사랑 안에서 연결되고 싶어.

너는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잘생기고 다정하고 멋진,

무적의 남편처럼 느껴지거든.

도파민이 팡팡 터질 일은 없겠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단단한 끈으로 연결된 존재.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고,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일순위로 나를 챙겨주고,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하고 즐거워할지 매일 연구하는 그런 존재.

어릴 땐 그랬잖아.

우리의 진짜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먼 거리와 시간을 돌아돌아 자리를 찾은 거라고 생각하자.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해.

네가 날 떠나면 어떡해?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아빠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를 다시 또 정복하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안 되겠다.

내가 또 편지 쓰러 올게.

중요한 얘기는 다음에 마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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