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차 사업일기
존재긍정이 어려웠다.
부모님을 이해하고 어릴 적 나를 이해해도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왜 태어났지?
너무 깊이 생각하면 독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끊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유를 알고 싶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성을 접하게 되었다.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며 무의식 정화를 하다 보면
내가 나로 존재하는 그 순간을 경험하는 듯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온했던 그 순간에 그냥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존재 이유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자로 다 설명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 과정에 들어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 신점을 보러 갔을 때도 우리는 사는 동안 이유를 결코 모를 것이라고,
그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알고 싶은 걸.
우주의 모든 비밀과 법칙을 알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그 작은 이유가 필요했다.
분명 내가 나로 존재하라는 그 말에 꽂히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영성에 빠진 이유가 있었을 거고,
그 한계를 느껴 에이그라운드로 들어온 이유도 있었을 거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이유를 모르지만,
다행인 건 이유를 몰라도 행동을 시작해볼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거다.
솔직히 좋은 유전자를 받았기에 이걸 활용해야 한다는 건
내게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재미있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더 와닿는다.
이 부분에서도 탄식을 떠올렸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어떤 탄식을 느꼈기에
지금까지 사는 이유를 고민하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걸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원치 않은 걸 받은 것.
내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계속 원치 않은 무언가를 받은 것.
훌륭한 유전자를 받은 것보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에 계속 결핍을 느꼈다.
과거는 돌릴 수 없고 부모님께는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분들은 주실 수 없는 분들이다.
안타깝지만.
그렇다면 나는 훌륭한 유전자를 받은 것으로 감사하자.
어쨌든 연약해보여도 한 번도 쓰러진 적 없는,
저혈압이나 그런 걸 겪어보지 못한,
체중 변화가 심하지 않은 건강한 신체를 받았다.
깨끗하고 희고 탄력 있는 좋은 피부도 물려받았고
나이보다 10살은 어려보이는 동안 외모도 물려받았다.
습득력과 학습력도 빠르고, 적당히 끼도 있다.
공부하는 만큼 성과가 나와준다.
몸을 쓰는 재능도 어느 정도 있어서
몸으로 하는 건 얼추 다 좋아하고 재미있어 한다. 나름 잘한다.
게다가 유연하다. 점점 유연성과 가동성이 좋아진다.
글 쓰는 재능도 있고,
외모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
처음 보는 이에게도 편안한 인상을 줄 수 있고
보니까 말도 잘한다. 강의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타고난 운도 좋은 것 같다.
가장 감사한 건 분신과도 같은 동생들이 있다는 것.
동생들이 없다면 나는 가족과 잘 지내지 못했을 거다.
잠도 잘 잔다. 잔병치레는 있었으나 큰 병에 걸린 적은 없다.
치아 뿌리도 튼튼해서 치과 신경치료를 받은 적도 없다.
회복력도 빠른 것 같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적응력도 빠르다. 이사를 간 적도 없는데.
친구들도 많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 늘 친구가 있었고 사람이 모였다.
받은 게 많다.
이렇게 보니 부모님께 받은 게 참 많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나를 불행한 아이라고 여겼는데,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태어나야 할 아이였다.
이렇게 훌륭한 유전자를 대대손손 남겨야 유전자 입장에서 이득이니까.
훌륭한 유전자와 또 다른 훌륭한 유전자가 만나야
진화적으로 또 훌륭한 유전자가 남을 테니까.
(물론, 부모님 어렸을 때는 이 유전자가 훌륭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을 거다.
정말 감사하게도, 시대를 잘 타고난 덕분에 이 유전자가 우세해졌다.)
진화론과 밈학을 배울 때, 묘하게 위로를 받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보다.
인간을 어떤 특별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진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
나는 또 문화콘텐츠를 전공했으니
밈의 관점에서 나라는 인간은 훌륭한 밈플렉스이기도 하다.
문화에 관심도 많고 심지어 연구도 열심히 했다.
그럼 나를 하나의 실험체로 생각한다면?
내가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며,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래야 나 같은 사람이 진화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실험한다면?
그거 되게 재미있을 것 같다.
흥미롭다. 아주 많이 매우 대단히.
뭐야, 어쩌면 옛날부터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혼자 튀고 이상한 길로 갔던 것도 실험체 하나로 설명이 된다.
오. 좋다.
스스로 진화적 실험체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게 나 자신이 살 수 있는 환경에 둬야 하고
내가 가진 우세한 유전자를 충분히 활용해야 하며
내 문화적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열심히 나를 알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까?
나는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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