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지키면서, 왜 나와의 약속은 늘 미룰까요?
그동안 병원을 어떻게 알리고 운영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잠시 시선을 돌려, 그 일을 해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병원 원장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정작 자신과의 약속은 자꾸 미루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일을 일찍 마치기로 했습니다.
며칠째 몸이 무거웠고, 가족에게도 저녁은 함께 먹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퇴근을 앞두고 연락이 옵니다.
“대표님, 이것만 오늘 안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깐 망설이다가 답합니다.
“네, 해드릴게요.”
상대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조금 전까지 지키려고 했던 내 일정은 다시 뒤로 밀립니다.
가상의 장면이지만, 일을 맡아 하는 대표님이라면 낯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을 거절하면 무책임해 보일까 봐,
일정을 조정하자고 하면 실망할까 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이 없을까 봐 일단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은 큰일처럼 느끼면서,
나와 한 약속을 미루는 일에는 금방 이유를 붙입니다.
“오늘만 조금 더 하면 돼.”
“바쁜 것만 지나면 쉬면 되니까.”
하지만 다음에도 부탁은 들어옵니다.
급한 일도 생깁니다. 그때마다 같은 이유로 나를 뒤로 미룬다면,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은 언제 지킬 수 있을까요?
이런 순간에 돌아볼 만한 원칙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이 문장을 생활과 사업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선택할 때 나의 상태도 빠뜨리지 않고 살피겠다는 약속입니다.
지금 감당할 수 있는지, 이미 지키기로 한 것은 무엇인지, 이 선택을 반복해도 괜찮을지 함께 묻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부담을 줄이고 싶다고 하면서 내가 모든 부담을 떠안고 있다면 어떨까요?
상대가 차분하게 판단하도록 돕고 싶지만, 정작 나는 피로와 불안 때문에 작은 반응에도 흔들리고 있다면 어떨까요?
한두 번은 힘을 내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계속 일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집중해서 들어야 할 말을 흘려듣거나, 충분히 검토해야 할 일을 서둘러 끝내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남은 피로를 쏟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상태는 내가 하려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키는 선택도 사명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을 지킬 이유를 오직 “그래야 일을 잘하니까”에서만 찾으면, 또다시 나의 가치를 성과에 매달게 될 수 있습니다.
일을 잘하지 못한 날에도 몸을 돌볼 이유는 있습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더라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이유는 있습니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는 그런 날의 나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을 먼저 지킬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 가족, 사명을 중요하게 두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일을 받을 때 그 일이 이 세 영역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을 수락하기 전에 지금의 몸 상태로 감당할 수 있는지, 이미 가족과 한 약속을 바꿔야 하는지, 내가 하려는 일의 방향과 맞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순서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지키려는지 알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없으면 가장 늦게 들어온 급한 요청이 가장 먼저 잡아둔 중요한 일을 밀어내기 쉽습니다. 상대의 급한 사정은 눈앞에 보이지만, 나의 피로와 미뤄진 약속은 내가 말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안에 추가 수정을 부탁받았지만, 이미 약속한 업무를 마쳤고 새로운 요청까지 처리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런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가 작업을 충분히 검토하기 어렵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전달드릴 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오늘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먼저 범위를 확인하겠습니다.”
상대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원하는 답이 아니니 아쉬움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고 바로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맡은 책임을 확인하고, 가능한 일정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했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이미 지키기로 한 기한이라면 상대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 조정해야 합니다. ‘나를 지킨다’는 원칙 안에는 내가 한 약속을 정직하게 다루는 태도도 들어갑니다.
이렇게 선택해도 미안한 감정은 남을 수 있습니다. 원칙이 있다고 해서 불안이나 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감정만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기준이 생깁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가능한 범위를 설명한 선택이었다.”
“상대가 아쉬워한다고 해서 나의 판단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이 한 선택을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고객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불만에서 고쳐야 할 점을 찾고,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반응 하나에 내가 해온 일과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전부 맡기면, 다음 선택도 그 반응을 피하기 위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부족하게 한 일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고치면 됩니다. 범위를 잘못 설명했다면 설명을 바꾸고, 일정을 무리하게 잡았다면 다음 약속을 조정하면 됩니다. 그 일을 근거로 나 자신 전체를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원칙은 잘못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나를 놓지 않겠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을 세운 사람도 다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는 분명하게 생각했던 일이 지친 저녁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일정을 조정하겠다고 해놓고 상대의 짧은 답장 하나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 일을 받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나는 원칙도 못 지키는 사람이구나”라고 결론 내리면, 원칙이 나를 평가하는 또 하나의 부담이 됩니다.
원칙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문장으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흔들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돌아올 기준이면 됩니다.
왜 이번에는 내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는지, 무엇이 두려워서 바로 수락했는지, 지금이라도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미 맡은 일을 책임 있게 마무리하면서 다음 요청에는 곧바로 답하지 않는 연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하루가 있었다고 해서, 나와 한 약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선택에서 그 약속을 지킨 경험을 남겨볼 수 있습니다. 일정이 어렵다고 설명했던 일, 불필요하게 늘어난 업무 범위를 조정했던 일, 쉬기로 한 시간을 지켰던 일을 기억해두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다음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반응이 두렵더라도 지난번에 어떻게 설명했고 무엇을 책임졌는지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믿음도 그런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조금씩 쌓아갈 수 있습니다.
생활과 사업을 오래 이어가려면 더 많은 일을 해내는 능력과 함께,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디에서 조정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을 세울 때 나의 몸과 중요한 관계, 내가 하려는 일의 의미도 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최근에 나와 한 약속을 미뤘던 순간 하나를 떠올려보셨으면 합니다.
그 선택은 꼭 필요했는지, 아니면 상대가 실망할까 봐 확인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는지 살펴보세요.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오면 무엇을 다르게 할지도 하나만 정해보면 좋겠습니다. 바로 수락하기 전에 일정을 확인하거나, 가능한 범위를 먼저 설명하는 정도여도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나와 한 약속도 선택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이 원칙이 가장 필요한 날은 모든 일을 잘해낸 날보다, 지치고 흔들려 나를 또 뒤로 미루고 싶은 날일 수 있습니다. 그날에도 내 상태를 살피고, 맡은 책임과 지킬 것을 함께 놓고, 다음 선택을 조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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